책을 권함


김애란 <비행운> 텍스트의 즐거움








이런저런 곁눈질과 시행착오 끝에 가까스로 얻게 된 한 줌의 취향. 안도할 만한 기준을 얻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던지.
상품 사이를 산책할 때 나는 엄격한 동시에 부드러운 사람이 됐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여유. 
그러나 원하지 않는 것 역시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식의 까다로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의심을 버리자 쇼핑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원하는 게 많아졌다.

- 210쪽, 큐티클


직장에 다닌 지 3년. 많은 돈을 모으진 못했지만 얼굴은 예전보다 맑아졌다.
그건 단순히 깨끗한 피부가 아닌 그 사람의 환경, 영양 상태, 심리적 안정감, 여가, 자신감 등 모든 것이 어우러져 드러나는 '총체적 안색'이었다.

- 213쪽, 큐티클


'1700년대 바흐가 작곡한 음악을, 2000년대 캄보디아에 온 한국 여자가 1900년대 글렌 굴드가 연주한 앨범으로 듣는구나' '이상하고 놀랍구나' 하고 생각했다. 세계는 원래 그렇게 '만날 일 없고' '만날 줄 몰랐던' 것들이 '만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 277쪽, 호텔 니약 따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 293쪽, 서른


저도 그랬으면 싶어요. 지금 선 자리가 위태롭고 아찔해도, 징검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도, 
한 발 한 발 제가 발 디딜 자리가 미사일처럼 커다랗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시퍼요.
나, 좀 늦었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당장 제 앞을 가르는 물의 세기는 가파르고, 돌다리 사이의 간격은 너무 멀어 눈에 보이지조차 않네요.

- 316쪽, 서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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