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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과도기를 경험하는 중이다. 2013

긴 과도기를 경험하는 중이다.

무엇이 좋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취향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어느 부류에 속한 것이고, 어떤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며, 그것을 좋아하는 내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확고한 취향이었고, 어떻게 보면 이유 없는 고집이었다.
취향이 확고하던 시절의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평을 호감과 비난, 둘로 나누어 생각했던 것도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게 말해주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좋아하던 것이 확실했던 만큼 싫어하는 것에 대한 확고함도 있었다.

그리고 내게 중요했던 한 시절을 지나,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달리 봤을 때 어떻게 생각될 수 있는지 저절로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나였지만, 내 안에는 여러 사람의 눈과 생각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무엇이 가장 좋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가장 좋은 것이 없는 시절은 심심했다.
무엇이든 무난하게 좋았고, 무언가가 좋았던 것 만큼 싫어했던 것도 없었으니, 누군가 혹은 무언가와 부딪힐 일도 없었다.
중립의 대가로 얻은 것은 안정과 평화였지만, 그만큼 난 특색없는 사람이 되었다.
안목에 대한 자신감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다.
저건 나쁜 면은 이렇지만, 이런 점이 좋다."

밖에서 원하는 건 중립적인 평이 아니라 확실한 의견이었다.

"그래서 너는 뭐가 좋은데?"

그 말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는 건 이거나 저거나 내 눈엔 다 무난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마음 끄는 것이 없다. 이거 저거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 거 같기는 한데, 내게 방향을 제시하여 더 낫게 할 만한 미학이 있는 것도 아니니 입을 다물거나 개중에 조금 더 나아보이는 아무거나를 고른다.

이런 상황을 몇 번 겪고 나서 깨달았다. 나는 취향의 과도기를 겪고 있다.
"둘 다 좋다"가 아니라 "둘 다 그게 그거고, 끌리는 게 없다"는 생각이 매번 들었다.
나는 "끌리는 것"을 새로 형성해가는 과정에 있다. 그러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이 취향의 과도기가 내 생각보다 길어지는 것은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것들을 쌓아놓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 쌓일라치면 그것이 채 여물기 전에 끄집어 내서 아이디어로 만들어야 한다.
뭔가 제대로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소모해버리는 것 같다.
제대로 된 안목과 취향이 생기기도 전에, 무언가를 분석하기 위해서 그 되지도 않는 견해를 내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 취향은 제대로 갖춰지기 전에 자꾸 밟힌다.

무엇보다도 여유 있게, 생각 없이 뭔가를 쌓을 시간이 없다.
천천히 보고 읽고 음미하고, 이전 취향의 끝을 다음 취향의 시작으로 잇는 그런 과정은 역시 학생 신분에만 가능한 것이었던 셈이다.

나는 이 취향의 과도기를 거쳐 만날 것이 꽤 독특한 지점에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내 취향은 늘 다소 독특하면서, 조금 세련된 것이었고, 얼만큼은 앞선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었으니까.

불안한 시기를 지나서 이제 여러 가지를 깊이 파보며 취향의 접점을 찾아보려 하는 중이다.
나는 긴 과도기를 경험하는 중이지만, 그 끝에는 근사하고 빛이 바래지 않는 어떤 것이 있으리라 믿는다.








덧글

  • 2013/11/09 17:27 # 삭제 답글

    이 것이 잘 써서 뿌듯하다는 일기인가보구나 ㅎㅎ 보면 사람들 느끼는 게 다들 비슷한가봐
  • 미닉 2013/11/13 13:54 #

    응 뿌듯했셔 ㅋㅋ
    다른 사람들도 이런 거 느껴? ㅎㅎㅎㅎ
  • 2013/12/11 01:06 # 삭제 답글

    "둘 다 그게 그거고, 끌리는 게 없다" 라고 느낌, 요새 들어 맘에 드는 영화, 음악, 만화, 그림 등 뭔가 "와! 이 거 죽인다!!" 하는 그런 게 없어. 걍 "저 것도 나쁘지 않고, 이 것도 나쁘지 않고...." 하고 있음..
    나의 경우엔 여유가 없다는 것 보다는

    "나의 취향은 이런 것이다."

    라는 강한 기준이 있는 것 같아. 그 기준이 이미 수년전에 확립된 것이고 그 이후로 변하지 않는데, 세상은 변하니 맘에 드는 것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란 생각을 하고 있어. 이제 더 이상 내가 즐겨 듣던 음악이나 만화가 나올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수용해야 되는데 잘 안되드라구. 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살고 있음. 사실 그냥 예전 음악, 영화, 만화만 봐도 재미있으니까...

    하지만 새로운 자극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
  • 미닉 2014/01/05 21:17 #

    오 이 견해 좋은데!
    취향에 대한 기준은 예전에 확립된 건데 세상에 그걸 만족시킬 게 새롭게 없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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